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주교 서울대교구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친일 논란 === 일제강점기에 서울대목구(경성대목구)를 필두로 한 한국 천주교회는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순응적이었고, 종교 기반의 유지와 선교권의 보장을 위해 친일 행각도 서슴지 않았다. 무단통치기의 8대 교구장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는 [[신민회]]의 독립운동가들을 밀고하여 [[105인 사건]]의 원흉이 되었다. 그 보상적 대가로 주교좌 명동성당의 부지를 확장했다. 서울대목구는 민족말살통치기에 들어서 더욱 노골적인 친일 행태를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호교적 차원의 허용이란 명분 하에 신자들에게 신사참배를 권고하였으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주교좌 명동성당에서 '(황국) 국위선양 평화미사'를 거행하고 황군위문금을 모금하는 등 전시총동원에 협력하였다. 서울대목구는 1938년 중일전쟁 1주년을 맞아 일제가 조직한 관변 전쟁협력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하 총동원조선연맹)에 가입했으며 이어 1939년 5월 종교단체로는 가장 처음으로 총동원조선연맹 산하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을 조직하였고 1940년 11월엔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창설 당시 53개의 본당과 6만 6천여 명의 신자로 구성)을 조직하는 등 일제에 대한 자발적 충성을 보였다. 이 연맹은 매월 첫째 주를 애국주일로 정해 '무운장구기원미사제'를 지냈으며 매월 1일에는 신자들과 함께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에 참배했다. >“폐하와 제국의 현명한 통치가 없었던들 우리가 오늘날 천주교회 신자로서 교회의 모든 본분을 안온하게 지켜 가고 있었을지가 의문이다. ....[[대동아 공영권|대동아]] 건설의 대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일억일심으로 만민익찬의 신체제를 강조하는 이 시기, 천주교 신자로서 국가정책에 적극 호응하기 위해...” >---- >1940년 매월 첫째 주일을 '교회 애국일'로 지정하며 이를 설명한 [[노기남]] 신부 발언 다만 성골롬반외방선교회의 아일랜드인 사제들{{{-3 (어거스틴 스위니 신부, 토마스 다니엘 라이언 신부, [[패트릭 도슨]] 신부 등)}}}은 목포와 춘천을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아예 조선총독부로부터 눈엣가시로 찍혀서 연금당했다. 원산의 [[베네딕토 수도회]] 독일인 수도자들도 탄압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